2-1이 지역에서 무엇을 더 볼 수 있나
이 절에서 볼 것
산이 많은 반도, 화산섬 제주, 물이 빠지면 드러나는 서해의 갯벌 — 단단한 돌과 넓은 바닷가의 땅입니다.
이 땅은 어떤 모습일까요?
1-3의 지도처럼 한반도는 산이 많습니다. 국토의 약 70%가 산이고, 산지는 동해 쪽이 가파르고 서쪽과 북쪽이 완만합니다. S23 큰 강은 대부분 서쪽으로 흘러 강가에 평야를 만듭니다. 근거 대기 마을과 궁궐도 산에 맞춰 지었습니다. 경상도의 옛 씨족 마을 하회와 양동은 숲이 우거진 산을 등지고 강과 들을 앞에 두었고 S7, 15세기 서울의 궁궐 창덕궁은 산자락의 지형을 그대로 살려 지었습니다. S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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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서울 창덕궁이 있는 지금의 수도
- 2동쪽 산줄기 반도의 동쪽을 따라 높은 산이 이어집니다
- 3서남 해안 섬과 갯벌이 많은 바닷가(아래)
- 4제주 화산섬(아래)
1-3의 지도를 다시 보면, 갈색 음영의 산지가 반도의 동쪽과 북쪽을 덮고 서쪽에 옅은 평야가 있습니다.
미 중앙정보국, "Korean Peninsula", 1993 — 미국 의회도서관 94-680586, 위키미디어 공용, 공개 도메인

안동의 한옥 마을입니다. 눈 쌓인 기와지붕 여러 채가 겹쳐 있고, 뒤로 눈 덮인 소나무 숲이 이어집니다.
사진: Robert (Picasa), "Korea-Snow in Andong-Hanok roofs-01", 2005 —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3.0
남쪽 바다의 제주는 화산이 만든 섬입니다. 유네스코는 제주의 한라산과 용암동굴, 화산재가 굳어서 된 돌 봉우리 성산일출봉을 세계유산으로 올렸고, 그 경치를 "탁월한 미적 아름다움"이라 적었습니다. S9

풀밭 너머로 성산일출봉이 솟았습니다. 왼쪽 끝은 회색 바위 절벽이고, 위쪽은 풀과 나무로 덮였습니다.
사진: Bernard Gagnon, "Seongsan Ilchulbong 01", 2022 — 위키미디어 공용, CC0
서쪽 바다는 사정이 다릅니다. 서해는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세계적으로 큰 바다라, 물이 빠지면 넓은 밀물 때 잠기고 썰물 때 드러나는 진흙 바닷가이 드러납니다. S24 사리 때 인천에서는 그 차이가 10미터 가까이 됩니다. S25 유네스코는 서남 해안의 갯벌 네 곳을 세계유산으로 올리면서, 이곳 주민의 생계가 갯벌에서 거두는 해산물에 기대고 있다고 적었습니다. S10

위성에서 본 전라남도 신안 앞바다입니다. 섬 사이로 회갈색 갯벌과 청록색 물길이 가지처럼 뻗어 있습니다.
NASA Earth Observatory, "A Thousand Islands in South Korea", 2020 — 위키미디어 공용, 공개 도메인
2-1-1 인접한 나라와의 관계
이 절에서 볼 것
중국에서 글과 제도, 도자 기술이 들어왔고, 반도는 그것을 고쳐 쓰고 다시 일본으로 보냈습니다.
이웃과는 무엇을 주고받았을까요?
동아시아사 연구자 사라 슈나이윈드는 반도와 일본 열도가 중국에서 논농사와 금속 도구, 다스리는 기술, 한자 문화를 골라 받아들였고,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두 곳도 그 전통을 함께 만들었다고 정리합니다. 그래서 이 문화를 순수한 중국 것으로만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S5 다만 그는 이 시기의 한국과 일본 역사책이 모두 뒤에 엮은 것이라 조심해 읽어야 한다고도 적습니다. S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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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한반도 대륙과 일본 열도 사이의 반도
- 2중국 중국 대륙
- 3일본 일본 열도
1905년 백과사전의 아시아 자연 지도입니다. 오른쪽 끝 가까이에 한반도(KOREA)가 있고, 그 왼쪽이 중국 대륙, 오른쪽 끝이 일본 열도입니다.
Dodd, Mead & Company, "Physical Map of Asia", 『The New International Encyclopaedia』, 1905 — 위키미디어 공용, 공개 도메인
받아들임과 자립이 한 세기에 함께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반도 동남쪽의 나라 신라는 7세기 당나라와 손잡고 당의 관복과 관직, 왕의 재위에 붙이는 해 이름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이웃 나라 백제와 고구려가 660년과 668년에 무너진 뒤 당이 신라까지 넘보자, 신라는 676년 당나라 군대를 반도에서 몰아냈습니다. S5
12세기에는 중국 송나라 사람이 고려(918~1392년의 왕조)의 그릇을 기록했습니다. 1123년 개성에 한 달쯤 머문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의 푸른빛 유약을 입혀 구운 자기 찻그릇이 송의 그릇과 닮았다고 적었습니다. 고려 귀족은 중국 도자를 사 모았고, 고려 청자는 송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무늬의 소재가 더 다양해져 12세기에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S15

「연꽃무늬 매병 (Maebyeong with lotus decoration - 작자 미상, 11세기 말~12세기 초)」: 어깨가 넓고 아래로 좁아지는 회청색 병(매병)입니다. 표면에 연꽃 무늬를 얕게 새겼고, 가는 금빛 선은 깨진 곳을 이은 흔적으로 보입니다.
작자 미상, 「연꽃무늬 매병」, 11세기 말~12세기 초, 청자, 높이 35.1 cm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27.119.1, 공개 도메인
고려 말 약 100년 동안 반도는 몽골이 세운 원나라의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조선 미술 도록은, 14세기 말 그 영향에서 벗어난 반도가 다듬어진 전통 미술과 조선만의 양식을 함께 만들어 갔다고 씁니다. S4
조선은 중국 명나라와 가깝게 지내며 해마다 사신을 보냈습니다. 약 300명의 사행단이 다섯 달 안팎을 오갔고, 나라에 속한 화가인 화원이 따라가 중국의 그림과 풍경을 보고 오기도 했습니다. S17
일본과는 전쟁(2-5)이 끝난 뒤 다시 이웃으로 사귀었습니다. 조선은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일본의 무사 정부에 외교 사절단을 열두 번 보냈습니다. S21 처음 세 번은 전쟁 때 끌려간 사람들을 데려오는 회답겸쇄환사였고, 그 뒤 사절을 통신사라 불렀습니다. S31
연표
- 7세기신라가 당의 관복·관직·연호를 받아들임 S5
- 676신라가 당나라 군대를 반도에서 몰아냄 S5
- 1123송 사신 서긍이 고려 청자를 기록 S15
- 14세기 말원의 영향에서 벗어나 조선 건국(1392) S4
- 1592~98일본의 침공, 도공이 끌려감(2-5) S16
- 1607~1811일본에 사절 열두 번(처음 세 번은 회답겸쇄환사) S21·S31
- 1910일본의 병합 S4
2-2이 지역에서 무엇을 쉽게 발견할 수 있나
이 절에서 볼 것
흰 흙과 닥나무 종이, 장을 담은 항아리, 마루와 온돌을 함께 둔 집.
이 땅에서 나는 재료와 생활은 어떤 모습일까요?
먼저 흙입니다. 단단한 백자를 만들려면 철분이 적은 흰 점토인 백자의 흰 바탕을 만드는 흰 점토, 유리질이 많고 철분이 적은 맑은 유약, 1,200~1,400도의 불이 필요합니다. 조선은 15세기에 이 백자를 완성했습니다. S4
그릇을 굽는 데는 흙과 나무가 함께 들었습니다. 조선 왕실은 1460년대 말 경기도 광주에 왕실 가마 분원을 두고 전국의 좋은 흙을 실어 왔고, 땔감 숲이 줄면 약 10년마다 가마를 옮겼습니다. S4
다음은 종이입니다. 한국의 전통 종이 한지는 닥나무 속껍질 섬유로 만듭니다. 틀을 좌우로 흔들어 섬유를 엇갈리게 쌓는 틀을 흔들어 뜨는 방법로 떠서, 섬유의 방향이 한쪽으로 뚜렷하지 않습니다. S13 일본 종이 와시와는 같은 닥 섬유를 써서 현미경으로도 가려지지 않고, 차이는 뜨는 방법과 쓰는 문화에 있습니다. S13 한국의 전통 집 한옥은 이 종이를 창과 문에 발랐습니다. 근거 대기

짙은 나무 기둥과 문틀 안에 격자 창호 두 짝이 있고, 가운데 창살 위에 흰 종이를 발랐습니다.
사진: Robert (Picasa), "Korea-Snow in Andong-Papered door in a Hanok-01", 2005 —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3.0
집 마당 한쪽에는 항아리가 줄지어 있습니다. 콩을 발효시켜 만드는 된장·간장·고추장 같은 장은 한국 식단의 바탕입니다. 유네스코는 장맛이 집집마다 달라 가족의 내력을 담는다고 적었습니다. S12

맨땅 위에 크고 작은 검은 갈색 항아리가 여러 줄로 놓였고, 앞쪽에 짚을 두른 낮은 담, 뒤에 돌담과 나무가 보입니다.
사진: Bernard Gagnon, "Jangdokdae in Naganeupseong 02", 2022 — 위키미디어 공용, CC0
집은 추운 겨울과 더운 여름을 함께 나도록 지었습니다. 아궁이 열기가 바닥 밑 통로(고래)를 지나 방바닥을 데우는 온돌이라고도 부르는 바닥 난방과, 여름에 서늘한 나무 마루인 대청을 한 집에 두었습니다. S26·S27 그래서 북쪽으로 갈수록 집이 닫힌 구조가 되고, 남쪽으로 갈수록 열린 구조가 됩니다. S27

안동 한옥의 마당입니다. 돌로 쌓은 높은 기단 위에 나무 툇마루와 기둥이 있고, 흙벽에 격자 창이 달렸습니다.
사진: Robert (Picasa), "Korea-Snow in Andong-Inside a Hanok-01", 2005 —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3.0
그러나 한국의 건물이 흰빛과 나무색만은 아닙니다. 궁궐과 절의 목재에 칠하는 단청은 주변에서 얻는 흙과 돌을 빻아 만든 안료를 주로 썼고, 일부는 중국과 서역에서 들여왔습니다. 녹색 안료 뇌록은 경상도 장기현이 거의 유일한 산지로 옛 지리지에 적혀 있습니다. S14
옷에서는 흰색이 눈에 띕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흰옷을 즐겨 입는 전통이 고대 중국 역사책의 기록에도 보이고, 조선 후기와 근대에 더 뚜렷해졌다고 적습니다. S28 왜 흰옷을 입었는지는 여러 설명이 있어 한 가지로 말하기 어렵습니다. S28
2-3시대별 문화 발전
이 절에서 볼 것
불교 조각에서 청자로, 다시 흰 백자와 진경산수로 — 믿음과 권력이 바뀔 때마다 그림과 그릇의 모습이 바뀌었습니다.
같은 땅에서 보이는 것은 시대마다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신라에서는 불교가 나라를 지키는 의례와 묶였습니다. 신라 왕실은 중국식 목조 사찰과 돌을 파서 만든 사찰, 금으로 만든 보살상을 만들었습니다. S5 8세기 경주 토함산의 석굴암은 흰 화강암으로 쌓은 인공 석굴로, 가운데 큰 불상(본존불)이 동해를 향해 앉아 있습니다. S6
그런데 오늘 보는 석굴암에는 근대에 고친 흔적도 남아 있습니다. 일본이 지배하던 1913~15년 천장 일부가 무너지자 전체를 해체해 다시 쌓고 콘크리트 돔을 씌웠고, 1960년대에 돔을 하나 더 씌웠습니다. 유네스코는 이 공사로 습기와 곰팡이 문제가 생겼다고 적습니다. S6

「서 있는 부처 (Standing Buddha - 작자 미상, 8세기)」: 석굴암과 같은 8세기 신라의 불상이지만, 높이 14센티미터의 작은 금동 불상입니다. 도금이 벗겨진 곳에 검은 청동이 드러납니다. 오른손을 들고 옷자락이 몸을 따라 길게 내려옵니다.
작자 미상, 「서 있는 부처」, 8세기, 금동, 높이 14 cm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12.37.136, 공개 도메인
고려는 불경과 불화에서 이름을 남겼습니다. 1237~48년 고려는 불경을 8만 장 넘는 목판에 새겼고, 이 판을 보관한 해인사의 15세기 건물 장경판전은 가장 오래된 대장경 보관소로 남아 있습니다. S11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는 금속활자로 불교 책 『직지』를 찍었습니다. S29 아래는 고려가 남긴 불교 그림, 불화입니다.

「수월관음도 (Water-moon Avalokiteshvara - 작자 미상, 14세기 전반)」: 물가에 앉아 달을 보는 관음보살을 그린 고려 불화입니다. 어둡게 바랜 비단 위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은 관음보살이 있고, 머리 뒤에 둥근 빛이 있습니다. 붉은 옷과 장신구가 비칩니다.
작자 미상, 「수월관음도」, 14세기 전반, 비단에 먹·채색, 114.5×55.6 cm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14.76.6, 공개 도메인
조선이 서자 나라 운영의 중심이 불교에서 유교로 옮겨 갔습니다. 조선은 유교의 한 갈래인 송나라 이후 발달한, 사람의 본성과 도덕을 따지는 유학을 나라 운영의 중심에 두었고, 불교는 나라 종교에서 밀려났습니다. 그래도 불화와 불경 간행은 서민과 왕실의 후원으로 이어졌습니다. S4 그림도 불교 그림에서 일상과 자연을 그린 그림으로 무게가 옮겨 갔고, 중국 송나라의 산수화를 바탕으로 조선만의 양식이 생겼습니다. S4
흰 백자가 조선 그릇의 중심이 된 것도 이때입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도록 필자는, 조선이 500년 내내 무늬 없는 백자를 앞세우고 여러 색 장식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한국만의 현상"이라 부르며, 아마도 유교의 순수와 검약을 그릇에 옮긴 것이라고 봅니다. 같은 글은 조선의 엘리트가 중국의 푸른 무늬 자기와 채색 자기를 수입해 즐겨 썼다는 사실도 함께 적습니다. S4


왼쪽은 무늬 없이 우윳빛으로 둥근 항아리이고, 위아래가 살짝 눌려 좌우가 꼭 같지는 않습니다. 오른쪽은 같은 흰 몸에 구리 안료로 붉은 포도 잎과 덩굴을 크게 그렸습니다.
작자 미상, 「달항아리」, 18세기 후반, 백자, 높이 38.7 cm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1979.413.1 · 작자 미상, 「포도덩굴무늬 항아리 (Jar with grapevine decoration - 작자 미상, 18세기 중반)」, 백자에 구리 안료, 높이 25.6 cm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1979.413.2, 모두 공개 도메인
18세기에는 실제 산을 그린 산수화, 진경산수가 나왔습니다. 화가 정선은 1751년 비가 갠 뒤의 서울 인왕산을 그렸습니다. S30 이 그림은 고려부터 이어진 실제 풍경 그림의 전통 위에서, 명승을 찾아 유람하던 문인들의 풍조와 함께 18세기에 자리 잡았습니다. S30

「인왕제색도 (Clearing After Rain in Mt. Inwang - 정선, 1751)」: 짙은 먹으로 칠한 거대한 바위 봉우리가 화면 위쪽을 차지하고, 아래에 소나무와 작은 기와집, 그 사이를 안개가 채웁니다. 서울의 실제 바위산 인왕산입니다.
정선, 「인왕제색도」, 1751, 종이에 먹, 79.2×138.2 cm — 위키미디어 공용(공유마당 출처), 공개 도메인
조선 후기와 말기의 그림에는 거리의 사람, 산신 신앙, 선비의 서재도 나옵니다. S22



왼쪽은 여성 여섯 명이 함께 걸어가는 19세기 풍속화(대부분 쓰개치마를 머리에 썼습니다), 가운데는 호랑이 위에 앉은 흰 수염의 산신을 그린 1874년 그림, 오른쪽은 열 폭에 걸쳐 책과 그릇을 선반 위에 빽빽하게 그린 20세기 초 병풍입니다.
작자 미상, 「풍속화첩 (Genre Paintings - 작자 미상, 19세기)」, 비단에 먹·채색 — Met 2026.343a–d · 「호랑이를 탄 산신과 시동 (Mountain God with Tiger and Attendants - 작자 미상, 1874)」, 비단에 먹·채색, 90.2×59.7 cm — Met 2015.253 · 「책가도 (Books and Scholars' Possessions - 작자 미상, 20세기 초)」, 비단에 먹·채색 10폭 병풍 — Met 2005.385, 모두 공개 도메인
근대에는 바깥의 눈과 제도가 들어왔습니다. 조선은 1897년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바꾸었고, 1910년 일본에 병합되었습니다. S4 아래 사진은 그 무렵 서구 사진 회사가 찍어 판 입체사진입니다.

대한제국 고관 윤웅렬의 집에서, 갓을 쓰고 흰 두루마기를 입은 두 남자가 바닥에 앉아 바둑을 둡니다. 뒤로 격자 창살 문과 산수 병풍이 보입니다.
Underwood & Underwood, 서울 윤웅렬의 집에서 바둑을 두는 모습, 1904년 무렵, 입체사진 반쪽 — 미국 의회도서관 LC-USZ62-72567, 위키미디어 공용, 공개 도메인
1922년부터 조선총독부가 연 공모전 조선미술전람회는 일본 정부가 주관하던 공모전(관전)의 입선·시상 체제를 따랐습니다. S20
일제 강점기의 박물관 두 곳, 조선총독부박물관과 이왕가박물관은 일본 제국이 '동양 문화'를 조사·수집·전시하는 앞선 거점으로 운영되었고, 국립중앙박물관은 스스로 이 역사를 비판적으로 다룹니다. S18
서양화도 이 길로 들어왔습니다. 화가 고희동은 1909년 한국인으로는 처음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들어갔고, 1915년 귀국해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가 되었습니다. S19
2-4이 지역만의 특징
한국을 다른 곳과 가르는 점은 흙과 종이에 있습니다. 조선은 500년 동안 무늬 없는 백자를 앞세웠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도록 필자는 이것을 "한국만의 현상"이라 부릅니다. S4 반면 한지와 일본 와시는 재료로는 가려지지 않습니다(2-2). S13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흰 달항아리의 소박함"이라는 미감에는 맞는 부분과 고쳐야 할 부분이 함께 있습니다.

1-3의 달항아리입니다. 이 그릇의 이름은 언제 생겼을까요?
맞혀 보기
'달항아리'라는 이름은 언제 처음 인쇄되었을까요?
조선에서는 이 그릇을 큰 항아리 '대호'라 불렀고, '달항아리'는 1963년 최순우의 신문 칼럼이 처음 인쇄한 이름입니다.
확인
흰 백자 — 맞습니다. 조선은 500년 동안 무늬 없는 흰 백자를 앞세웠습니다. 다만 같은 시대에 붉은 포도 무늬를 그린 백자도 함께 있었습니다(2-2). S4·S22
바로잡기
달항아리라는 이름 — 조선에서 이 그릇은 실제로 쓰던 큰 항아리 '대호'였습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1800년대에 인기가 줄었다가 20세기에 다시 주목받았다고 적습니다. '달항아리'라는 이름은 1963년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최순우의 신문 칼럼에 처음 인쇄되었습니다. S3·S1
바로잡기
소박함과 '비애의 미' — 서론의 그 일본 비평가는 야나기 무네요시입니다. 그는 조선 그릇의 소박함을 칭찬하면서, 한국 미술을 오랜 외세 침략의 고난과 이어 '비애의 미'라고도 했습니다. 시인 최하림은 1974년 이 시선이 일본 제국주의의 문화 정책과 맞닿아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S2 2005년 이후의 "한국미의 극치"라는 말은 국가 기관이 붙인 이름입니다. S1
2-5다른 나라, 그리고 한국의 시각문화에 준 영향
이 절에서 볼 것
전쟁으로 끌려간 도공이 일본 자기를 시작했고, 그 자기가 유럽으로 건너갔습니다.
반도의 기술은 어떻게 바다를 건넜을까요? (이웃에게서 받은 것은 2-1-1에 있습니다.)
가장 뚜렷한 길은 전쟁이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도록은 일본의 규슈 아리타 일대에서 구워 이마리 항구로 실어 낸 일본 자기가 임진왜란(1592~98년 일본의 침공) 때 끌려간 조선 도공(사기장)에게서 자기 굽는 기술을 얻으며 시작했다고 씁니다. 같은 도록은 규슈 아리타 자기의 시초로 조선 사기장 이삼평을 꼽습니다. S16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도록도 일본 자기가 1600년 무렵 한국과 중국에서 건너온 도공들에게서 시작되었다고 적습니다. S4
일본 자기는 그 뒤 중국의 기법도 받았습니다. 아리타의 채색 자기는 1640년대 중국인에게서 채색 기법을 배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S16 그리고 1655~83년 중국이 바다 무역을 막아 중국 자기 수출이 끊기자, 일본 자기가 대신 유럽으로 팔려 나갔습니다. S16

아리타에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주문으로 만든 접시입니다. 가운데에 회사 머리글자(VOC)를 넣고, 테두리를 칸으로 나눠 푸른 꽃무늬를 그렸습니다.
아리타 자기, 「VOC 모노그램 접시 (Plate with Monogram of the Dutch East India Company - 아리타 자기, 1660년경)」, 청화 자기, 지름 31.4 cm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2002.447.40, 공개 도메인
한국 그림이 일본에 건너간 일도 있습니다. 다만 15세기 조선 화가 안견의 양식을 따른 산수화는 에도 시대 일본에서 중국 송나라 그림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S4
한국의 도자 기술은 이렇게 도공을 따라 일본으로, 다시 일본 자기를 따라 유럽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림은 건너가서도 한국 것으로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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