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이 지역에서 무엇을 더 볼 수 있나
먼저 땅부터 보겠습니다. 일본은 유라시아·북아메리카·태평양·필리핀해의 네 판이 만나는 곳에 있고, 판이 부딪치고 밑으로 들어가면서 지진과 화산이 생겨 땅의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S6. 세계 활화산의 약 10%가 일본에 있습니다 S6. 1-3의 지도에서 열도 왼쪽으로 한반도 남부가, 동쪽으로 깊은 바다 밑이 보입니다.
1-3 지도: "Japan Relief Map of Land and Seabed", 2009, 전 지구 지형 모델(ETOPO1) 기반 지도 — 미국 항공우주국(NASA)·해양대기청(NOAA) 자료, 위키미디어 공용, 공개 도메인
그 화산들 가운데 후지산은 높이 3,776m로 홀로 우뚝 솟은 화산입니다 S7. 사람들은 그 모양과 이따금 일어나는 분화를 경외해 산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고, 정상까지 오르는 순례와 호수·샘에서 몸을 씻는 의례가 생겼습니다 S7. 후지산 그림은 14세기부터 많이 만들어졌고, 17~19세기에는 그림과 문학, 정원과 공예의 핵심 소재가 되었습니다 S7. 1-3의 파도 판화도 에도 시대 판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가 여러 곳에서 바라본 후지산을 그린 연작의 한 장입니다 S3.
다음은 계절입니다. 미국의 일본 문학 연구자 하루오 시라네는 책 『일본과 사계절 문화』(2012)에서, 8세기 이래 일본 문화 곳곳에 계절이 배어 있다고 봅니다 S18. 그렇다면 일본의 계절은 어떤 모습일까요? 교토와 오사카가 있는 간사이 지방을 예로 들면, 겨울에는 시베리아의 찬 바람이 동해 쪽 산지에 많은 눈을 내리고 태평양 쪽은 맑습니다. 6월 초부터 7월 중순까지 장마가 이어지고, 9월에는 가을 장마와 태풍으로 비가 많습니다 S13. 일본에 상륙하는 태풍은 한 해 평균 세 개이고, 9월에 가장 많습니다 S14. 그래서 같은 곳도 철마다 눈, 장맛비, 맑은 하늘로 다르게 보입니다.
사람들은 이 계절의 변화를 꼼꼼히 기록했습니다. 교토에는 9세기 초부터 산벚나무가 활짝 핀 날짜를 적은 일기와 기록이 1,200년 치 남아 있고, 연구자들은 그 날짜로 옛날 3월의 평균기온을 다시 계산했습니다 S15. 꽃이 피는 날은 1,200년 동안 해마다 누군가 지켜본 장면이었습니다.
계절의 색에 대한 관심은 옷에도 나타났습니다. 헤이안 시대(794~1185년, 수도를 지금의 교토로 옮기고 귀족이 문화를 이끈 시기)의 귀족은 매화가 붉은 봉오리에서 연분홍 꽃으로 바뀌는 것처럼 계절의 색 변화를 따서, 비단 옷을 겹쳐 입는 색 조합을 100가지 넘게 정했습니다 S17. 헤이안 말기에는 다섯 겹이 표준이었고, 여러 겹을 겹쳐 입어 목깃과 소매 끝, 옷단에 겹마다 색이 한 줄씩 보였습니다. 흰 겉감 밑에 붉은 안감을 대면 벚꽃빛이 비쳤습니다 S17. 다시 말해 계절은 풍경으로만 보인 것이 아니라 옷의 색과 비치는 정도로 옮겨졌습니다(색·투명도).
그렇다면 일본 사람이 원래 자연과 특별히 가까웠던 것일까요? 이 물음에는 연구자들의 의견이 갈립니다. 시라네는 일본의 시와 미술이 맺어 온 관계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 다듬어 만든 "두 번째 자연"과의 관계라고 봅니다 S18. 그런데 시라네의 책을 평한 한 연구자는 그 주장이 모든 시에 해당하는 당연한 말이고, 헤이안 귀족의 취향을 일본 전체로 넓혔다고 비판합니다 S18.
땅이 자주 흔들리고 풍경이 바뀌어서 일본 사람들이 덧없음을 그렸다는 설명도 있습니다. 이 설명은 1905년 미국 비평가 찰스 카핀의 미술 해설서에 나옵니다. 카핀은 모든 것은 변해 사라진다는 불교의 가르침(무상)을 소개하면서, 일본에 10년 가까이 산 서양 작가 라프카디오 헌의 글에서 땅과 풍경이 쉽게 바뀐다는 대목을 예로 들었습니다 S19.
일본 문헌에서도 덧없음은 이 무상으로 표현됩니다 S9. 땅이 불안하다는 사실과 덧없음을 노래하는 전통이 같은 나라에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땅이 그 감수성을 낳았다고 말할 근거는 없습니다.
계절을 즐기는 습관은 오늘도 행사로 남아 있습니다. 음력 8월 보름에는 달을 보며 억새를 꽂고 경단을 올리는 달맞이를 하고, 가을에는 단풍을 보러 산으로 나갑니다 S20.
2-1-1 인접한 나라와의 관계
일본의 화면에서 바다 건너온 것은 무엇이고, 언제 어떤 길로 들어왔을까요?
6세기 중반, 한반도 서남쪽 백제의 성왕이 일본 왕실에 석가상과 경전을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S71. 720년에 편찬된 역사책 『일본서기』는 이 일을 552년으로, 다른 기록은 538년으로 적습니다 S22. 불교와 함께 한자, 역사를 적는 방법, 화폐, 도량형이 중국과 한반도에서 들어와 나라의 틀이 되었습니다 S23.
7세기부터는 중국에 직접 사절을 보냈습니다. 600~614년에는 수나라에, 630년부터는 당나라에 사절단을 보냈고, 8세기부터는 배 네 척에 500명이 넘게 탔습니다 S24·S25. 당나라로 가는 사절은 894년에 멈췄습니다 S25. 이 사절 덕분에 그때까지 한반도를 거쳐 오던 대륙 문화가 중국에서 직접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S24.
10~13세기에는 중국 송나라 상인이 일본 서남쪽 섬 규슈의 항구에 와서 향료·도자기·책·동전을 팔고, 일본은 칼·수은·유황을 팔았습니다 S26. 이 무역과 함께 선종도 들어왔습니다. 선종은 앉아서 참선하며 깨달음을 구하는 불교로 S26, 무사들이 13세기부터 받아들였습니다 S27.
그림에서도 송나라가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1908년 영국 미술사가 로렌스 비니언은 14~16세기 일본 화가들이 송나라의 옛 그림에서 영감을 얻어 먹으로 작은 크기의 그림을 그렸다고 적었습니다 S72.
16세기 말에는 전쟁이 문화가 들어오는 경로를 바꿨습니다. 1592~98년 일본의 무사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두 차례 침공했고, 이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5만~6만 명 가운데 도공들이 있었습니다 S28. 이 도공들과 함께 규슈 여러 곳에 조선 계통의 도기를 만드는 가마가 생겼습니다 S28.
규슈 아리타의 첫 자기 가마는 전통적으로 조선 도공 이삼평에게 돌립니다 S29·S30. 하지만 최근 가마터 발굴은 초기 아리타의 청화 자기(흰 바탕에 파란 그림을 그린 자기)에 중국 도자의 영향이 더 강하다고 봅니다 S29.
활자 인쇄도 이 무렵 들어왔습니다. 침공 때 조선의 구리 활자와 활자본이 건너가, 목판 인쇄뿐이던 일본 출판에 활자 인쇄가 퍼졌습니다 S31. 같은 무렵 유럽 선교사들도 1590년 서양식 인쇄기를 들여왔습니다 S73.
전쟁이 끝난 뒤 1607년 일본과 조선은 국교를 다시 열었고, 조선 왕은 1811년까지 열두 차례 300~500명 규모의 사절단(조선통신사)을 일본에 보냈습니다 S32. 정리하면, 일본의 먹 그림과 도자기, 활자로 찍은 책은 한반도와 중국을 거쳐, 또는 중국에서 직접 들어온 기술 위에서 만들어졌습니다.
2-2이 지역에서 무엇을 쉽게 발견할 수 있나
일본에서 흔히 쓰는 재료는 무엇이고, 그 재료는 어떤 조건에서 쓰였을까요?
먼저 나무입니다. 일본은 덥고 습해 나무 건물을 정기적으로 고쳐야 하고, 목조 건물을 짓고 고치는 기술도 함께 이어지고 있습니다 S33. 나라 지방의 절 호류지에는 7세기 말에서 8세기에 지은 건물이 상한 부재만 갈아 끼우며 남아 있고, 이 건물들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 축에 듭니다 S34.
일본 고유의 신앙인 신도의 중요한 신사 이세 신궁은, 690년에 시작된 전통에 따라 20년마다 건물을 바로 옆에 편백 나무로 새로 짓습니다. 2013년이 62번째였습니다 S35. 그래서 이세 신궁의 건물은 1,300년 넘은 전통을 이으면서도 늘 20년이 안 된 새 나무로 서 있습니다.
다음은 종이입니다. 와시(닥나무 섬유를 맑은 강물에 풀어 대발로 떠서 만드는 손종이)는 편지와 책뿐 아니라 병풍과, 나무틀에 종이를 바른 미닫이(쇼지)에도 쓰였습니다 S36. 판화 종이도 뽕나무 계열 나무의 속껍질로 만들었습니다 S37.

격자 나무틀에 종이를 바른 쇼지로, 아래쪽에는 유리를 끼웠습니다. 어두운 방 안에서 위쪽 종이는 바깥빛을 받아 연한 회청색으로 보이고, 아래 유리 너머로 눈 덮인 정원이 밝게 보입니다.
사진: Tamaki Sono, "Yukimi shōji", 2012 —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2.0
칠과 금박은 습기와 이어져 있습니다. 옻(옻나무 수액)은 습기 속에서 굳기 때문에, 칠하는 사람은 일부러 습한 상자에 넣어 말렸습니다 S38.
금박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 금박의 98% 이상을 만드는 금박 산지 가나자와의 장인들은, 습한 날씨가 정전기를 줄여 금을 얇게 펴기 좋다고 말합니다 S40. 습기는 칠과 금박을 만드는 데 알맞은 조건이었습니다. 옻칠한 그릇의 윤기와 금박 병풍의 반짝임은 이런 조건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옷의 색에는 법이 남긴 흔적이 있습니다. 에도 시대(1603~1867년, 도쿠가와 가문이 지금의 도쿄인 에도에서 나라를 다스린 시기)의 정부는 사치를 막으려고 서민의 옷을 회색·갈색·남색으로 제한하고 금실과 밝은 색을 금했습니다 S41. 그러자 포목상들은 이 세 색을 100가지가 넘는 미세한 변주로 나눴습니다. 호놀룰루 미술관은 이 색 묶음을 "마흔여덟 갈색, 백 가지 회색"이라는 말로 소개합니다 S41. 금지가 색의 종류를 줄이자, 좁은 범위 안에서 색의 차이가 늘어난 것입니다. 남색은 쪽이라는 풀로 물들였고, 에도 시대에 무명옷이 퍼지면서 쪽 염색이 널리 쓰였습니다 S42.
2-3시대별 문화 발전
종교와 정치가 바뀔 때 일본의 화면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9세기 말 당나라로 가는 사절이 멈춘 뒤, 헤이안 귀족 사이에서 일본 글자(가나), 이야기책(모노가타리), 일본의 풍경과 이야기를 그린 그림(야마토에)이 자랐습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이 시기를 중국과의 공식 관계가 끝난 뒤 안쪽 문화에 집중한 때로 설명합니다 S21. 반면 일본의 한 백과사전은 이 일본풍 문화가 사절 중단의 결과는 아니라고 적습니다 S25. 두 일이 같은 시기에 나타난 것은 맞지만, 하나가 다른 하나를 낳았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15세기 무사들의 후원 속에 다도(손님을 모시고 차를 내어 마시는 의례)가 자랐고 S27, 16세기 중엽에는 호화로운 차 모임에 맞서 좁은 방에서 거친 그릇으로 차를 마시는 검소한 다도가 꽃피었습니다 S5. 16세기 다도의 스승 센노 리큐는 교토의 도공 조지로에게 이런 다도에 쓸 소박한 질그릇 찻사발을 만들게 했습니다 S9. 아래 사발은 그 뒤 17세기 초에 만든 검은 라쿠 찻사발입니다. 라쿠는 조지로에게서 시작된, 낮은 온도로 구운 찻사발 계통입니다. 근거 대기

「검은 라쿠 찻사발 (Black Raku Tea Bowl - 작자 미상, 17세기 초)」: 둥근 통 모양의 검은 사발로, 입구가 고르지 않고 표면은 광택 없이 거칩니다(질감).
작자 미상, 「검은 라쿠 찻사발」, 17세기 초, 라쿠 유약 질그릇, 높이 9.2 cm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17.118.74, 공개 도메인
그런데 같은 16세기 말, 전국을 통일해 가던 무사들은 성을 짓고 건축과 가구, 그림과 옷에 금을 아낌없이 썼습니다 S8. 금을 쓴 화려한 양식과 낡고 소박한 다도 미학이 같은 시기에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S8.
17세기에 들어서자 정부는 나라 밖과의 왕래를 막았습니다. 1630년대 정부는 일본인이 바다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고, 유럽 나라 가운데 네덜란드만 무역을 이어 가게 했습니다 S43. 네덜란드 상인은 나가사키 항 안에 부채꼴로 쌓은 작은 인공섬 데지마에서, 중국 상인은 나가사키 시내에서 무역을 했습니다 S43·S44.
이 시기에도 금박 병풍은 계속 그려졌습니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 교토에서 회화와 칠기 도안으로 이름난 화가 오가타 고린은 S49, 「야쓰하시의 붓꽃 (Irises at Yatsuhashi, Eight Bridges - 오가타 고린, 1709년 이후)」을 금박 바탕 위에 그렸습니다 S70.

「야쓰하시의 붓꽃」: 병풍 한 쌍 가운데 한 점입니다. 금박 바탕 위에 파란 붓꽃 무리와 지그재그로 꺾인 나무다리를 그림자 없이 그렸습니다.
오가타 고린, 「야쓰하시의 붓꽃」, 1709년 이후, 육곡 병풍 한 쌍, 금박 종이에 채색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53.7.1, .2, 공개 도메인
18세기에는 바깥의 원근법이 판화로 들어왔습니다. 18세기 중엽 무렵, 극장 안이 깊숙이 들어간 것처럼 원근을 과장한 판화(우키에)가 나왔습니다 S46. 일본의 사전들은 여기에 중국 청나라에서 들어온 원근 그림의 영향이 있었다고 적습니다. 볼록렌즈로 들여다보던 이 그림을 안경회라고 부릅니다 S46·S47. 18세기 후반에는 일본 화가들이 네덜란드 무역으로 들어온 서양 동판화와 책 삽화를 베끼며 원근법과 그림자 표현을 익혔습니다 S45.
19세기 초에는 새 안료가 판화의 파랑을 바꿨습니다. 1704년 베를린에서 발견된 합성 파랑 안료 프러시안 블루가 일본에도 들어왔고 S48, 1831년 호쿠사이의 후지산 연작 광고는 이 파랑을 새 특징으로 내세웠습니다 S3. 분석해 보면 판화가는 이 파랑을 원래 쓰던 쪽빛과 섞고 덧찍어, 짙으면서도 선명한 파랑을 만들었습니다 S3.
이 판화들은 우키요에였습니다. 우키요에는 에도 도시의 부유한 상공인들이 즐기던 판화로, 그림 그리는 사람·판을 새기는 사람·찍는 사람·펴내는 사람이 일을 나눠 만들었고, 색마다 판을 하나씩 새겼습니다 S37.
1908년 비니언은 호쿠사이의 풍경 판화가 복잡한 형태와 색을 뚜렷한 윤곽과 몇 가지 색으로 줄였다고 설명했습니다. 색마다 판을 새겨야 하는 목판의 방식에 맞춘 도안이라는 것입니다(경계·면) S49.
19세기 중엽에는 바깥 나라들이 개항을 요구했습니다. 1853년 미국 함대가 와서 개항을 요구했고, 1854년 조약으로 두 항구를 열었으며, 1858년 통상 조약을 맺었습니다 S50. 1867~68년 막부의 우두머리인 쇼군이 물러나고 천황 중심의 메이지 정부가 섰고, 새 정부는 외국인 교사와 기술자를 불러들였습니다 S51.
미술 교육도 둘로 출발했습니다. 정부는 1876년 이탈리아 화가를 교사로 불러 서양 미술 학교를 열었고 S52, 1887년에는 초기에 일본화와 나무 조각만 가르치는 도쿄미술학교를 세웠습니다 S53.
근대에는 카메라 같은 보는 도구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1917년 일본광학공업(지금의 니콘)이 세워졌고 S54, 1933년에는 독일 카메라를 분해해 연구하던 연구소(지금의 캐논)가 문을 열었습니다 S55. 일본 카메라는 1960년대에 생산과 수출에서 독일을 앞섰다고 연구자들은 봅니다 S56.
2-4이 지역만의 특징
처음에 떠올린 일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정원과 파도 판화로 기억되는 일본, 그것은 맞는 말일까요?
먼저 정원입니다. 교토의 선종 사찰 료안지에는 흰 자갈 위에 돌 무리를 놓은 돌 정원이 있습니다. 근거 대기

교토 료안지의 돌 정원: 흰 자갈과 이끼 낀 돌, 흙담 너머로 벚꽃이 보이고, 앞줄에는 정원을 보러 온 관광객이 앉아 있습니다. 자연을 그대로 둔 풍경이 아니라 사람이 돌과 자갈을 골라 놓은 풍경입니다.
사진: DimiTalen, "Ryōan-ji rock garden with silhouettes of tourists", 2016 — 위키미디어 공용, CC0
여행자들이 꼽은 정원 구경은 이런 풍경을 보는 일입니다. 다만 바깥에 보이는 일본의 모습은 일부러 고른 것이기도 했습니다. 1873년 빈 만국박람회에 메이지 정부가 처음 공식 참가했을 때, 출품작은 정부가 고용한 독일인 고문 바그너의 지도 아래 골랐습니다. 이 박람회에서는 서양 제품을 흉내 낸 물건 대신 "일본의 정수"를 보여 줄 섬세한 공예를 모았습니다 S10. 정원도 파도 판화도 아닌 공예품이지만, 바깥에 무엇을 보여 줄지 골랐다는 점에서 같은 일입니다.
영어권에서 일본 미감의 이름처럼 쓰는 "와비사비"도 그렇습니다. 이 말은 다도에서 온 '와비'와 시에서 온 '사비'를 붙인 합성어인데, 일본어 사전에는 없고 일본 밖에서 더 자주 쓰입니다 S5. 와비는 수수하고 소박한 멋, 사비는 오래되어 낡은 멋을 가리킵니다. 근거 대기
일본 사람도 바깥을 향해 이 이미지를 설명했습니다. 1906년 미술 교육자 오카쿠라 가쿠조는 영어로 『차 이야기』를 써서, 서구 독자에게 비워 두고 좌우를 맞추지 않고 일부러 완성하지 않은 것을 높이 치는 다실을 소개했습니다 S11.
바깥 사람도 같은 방향으로 설명했습니다. 타우트 저작집의 한 서평은, 1933년 일본에 온 독일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가 17세기 왕실 별궁인 가쓰라의 단순함을 "진짜 일본"으로, 화려한 장식을 진짜가 아닌 것으로 나눴다고 소개합니다 S12.
그렇다고 이 이미지가 꾸며낸 것은 아닙니다. 료안지 같은 돌 정원은 실제로 있고, 검소한 다도와 그 찻사발은 15~16세기 일본의 기록과 실물에 있습니다 S27·S9. 판화의 뚜렷한 윤곽과 색도 실제 판화에서 볼 수 있습니다 S49.
하지만 처음 이미지와 다른 점이 둘 있습니다. 첫째, 소박한 다도와 같은 시대에 금을 쓴 화려함이 함께 있었습니다 S8. 일본어 안에도 화려함(하데)과 수수함(지미)이 짝을 이루어 있습니다 S9. 둘째, 서구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그림으로 꼽는 파도 판화는 서양 원근법의 영향을 받은 낮은 지평선과 수입 물감으로 그렸습니다 S2·S3. 덧붙여 일본 미술을 덧없음으로 읽는 설명도, 2-1에서 본 대로 미국 비평가가 서양 작가의 글을 빌려 쓴 해석입니다 S19.
2-5다른 나라, 그리고 한국의 시각문화에 준 영향
일본의 화면은 바다 밖으로 어떻게 나갔을까요?
1853년 개항 뒤 일본 판화가 유럽에 대량으로 들어갔고,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일본 전시는 파리 사람들이 처음 본 본격적인 일본 공예 전시였습니다 S57·S58. 판화가 도자기를 싸는 종이로 처음 건너왔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일본 국립국회도서관과 일본의 사전도 이를 "전해진다"고만 씁니다 S10·S59.
이렇게 사람과 물건과 전시를 따라 일본 그림을 모으고 따라 그린 유럽의 유행을 자포니즘이라고 부릅니다 S57. 그 사람 가운데에는 1878년 파리 박람회에서 통역을 맡았다가 파리에서 일본 미술을 파는 상인이 된 하야시 다다마사도 있었습니다 S10.
화가들이 가져간 것은 저마다 달랐습니다. 프랑스 화가 에드가 드가는 일본 소품을 그려 넣지 않고, 긴 화면과 한쪽으로 쏠린 구도, 비워 둔 공간 같은 짜임을 받아들였습니다 S57. 1888년 무렵 프랑스 화가 폴 고갱 주변의 화가들은 자연을 그대로 그리지 않고 바꾸어 그리는 근거를 무엇보다 일본 판화에서 찾았습니다 S60.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1887년 파리에서 에도 시대 판화가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오하시 아타케의 소나기 (Sudden Shower over Shin-Ōhashi Bridge and Atake - 우타가와 히로시게, 1857)」를 유화로 옮겨 그렸습니다. 다리와 빗줄기의 구도는 그대로 두고 색을 원본보다 강하게 했으며, 원판의 비율을 지키려 둘레에 넓은 테두리를 둘렀습니다 S61.


왼쪽 히로시게의 원본과 오른쪽 「빗속의 다리, 히로시게를 따라 (Bridge in the Rain, after Hiroshige - 빈센트 반 고흐, 1887)」를 나란히 보면, 다리는 더 노래졌고 강물은 청록에서 초록으로 바뀌었습니다. 붉고 초록인 테두리에는 한자를 닮은 글자를 그려 넣었습니다.
우타가와 히로시게, 「오하시 아타케의 소나기」, 1857, 목판화, 34×24.1 cm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JP2522, 공개 도메인 · 빈센트 반 고흐, 「빗속의 다리, 히로시게를 따라」, 1887, 캔버스에 유채 — Van Gogh Museum, Amsterdam (Vincent van Gogh Foundation) s0114V1962, 공개 도메인
미국에서는 미술 교육으로 건너갔습니다. 미술 교사 아서 웨슬리 다우는 보스턴의 일본 미술 연구자와 함께, 선과 명암과 색을 차례로 훈련하는 수업을 준비해 1889년 처음 열었습니다. 그의 책 『구성』에는 일본 판화와 직물의 색 구성을 다룬 장이 따로 있습니다 S62.
한국에는 일본을 거쳐 들어온 것이 셋 있었습니다. 그 배경에는 1876년 조선이 일본과의 불평등 조약으로 항구를 연 일 S63, 그리고 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한 일이 있습니다 S66.
첫째는 사진입니다. 사진술이 일본을 거쳐 들어와 1884년 서울에 첫 사진관 기록이 남았습니다 S64. 둘째는 서양화입니다. 화가 고희동은 1909년 한국인으로는 처음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들어갔고, 1915년 귀국해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가 되었습니다 S65.
셋째는 전시 제도입니다. 1922년부터 조선총독부가 연 공모전인 조선미술전람회는 일본 정부가 주관한 공모전(관전)의 입선·시상 체제를 따랐습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미술 용어사전은 전통 회화를 '동양화'로 부른 이 분류와 일본화의 영향이 한국 화단에 남았다고 평가합니다 S67.
일본의 미술 비평가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 도자를 아껴 1924년 서울에 조선민족미술관을 세웠습니다 S68. 하지만 한 서평은 야나기가 조선 도자를 소박하고 어린아이 같다고 여긴 데에 위에서 내려다보는 태도가 있었다고 봅니다 S69.
일본의 화면은 이렇게 판화와 상인과 박람회를 따라 유럽으로, 미술 수업을 따라 미국으로, 식민 지배의 제도를 따라 한국으로 건너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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