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이 시기에 무엇을 더 볼 수 있나
이 세기의 변화를 사진, 바다를 건넌 그림, 밤의 빛 순서로 봅니다. 1-3 왼쪽 사진은 미국 사진관 사우스워스 앤드 호스가 찍은 「앨버트 샌즈 사우스워스 (Albert Sands Southworth - 사우스워스 앤드 호스, 1845~50년경)」입니다.
사진이 나오다
사진은 처음에 어떻게 세상에 나왔을까요? 다게르는 무대 위에 빛으로 장면을 보여 주는 디오라마를 운영하던 프랑스 사람입니다. 1839년 프랑스 정부는 그와, 그와 함께 연구한 사람의 아들에게 연금을 주고 사진 공정을 사들인 뒤 누구나 쓰도록 공개했습니다 S1. 연금을 정하려고 의회에 낸 법안은, 이 방법이면 "가장 서투른 사람도 숙련된 화가만큼 정확하게" 그릴 수 있다고 적었습니다 S1.
그렇다면 화가들은 사진을 걱정했을까요? 의회에 낸 문서는 사진이 미술에 해가 된다는 의견도 있었다고 적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프랑스 화가 폴 들라로슈는 사진이 가장 숙련된 화가들에게도 관찰과 연구의 주제가 될 것이라고 평했습니다 S1.
사진은 기록 도구로도 쓸모가 컸습니다. 의회에 사진을 보고한 과학자 아라고는, 이집트 유적의 상형문자를 손으로 베끼려면 수십 년과 많은 화공이 들 일을 이 방법이면 한 사람이 할 수 있다고 내다봤습니다 S1.
노출 시간과 초상
처음 사진은 오래 앉아 있어야 찍혔습니다. 1839년 파리에서는 여름에 3~4분, 봄과 가을에 7~8분이 걸렸고, 그늘진 대상은 20분이 걸리기도 했습니다 S1. 같은 해 9월 뉴욕에서는 이보다 길어, 초상을 찍으려면 10~20분을 버텨야 했습니다 S4. 초기 초상은 회색 담요 같은 고른 배경 앞에서, 대비가 강한 옷을 피해 찍었습니다 S2.
빛에 반응하는 약품을 바른 재료(감광 재료)가 나아지면서 노출은 "시간에서 분으로, 분에서 초로" 줄었습니다 S3. 1851년 공개된 습판(유리에 약품을 발라 젖은 채로 찍는 방법)은 노출이 짧아, 빛을 등진 건물까지 찍을 수 있게 했습니다 S4.
초상을 갖게 된 사람들
미국에서는 초상 사진이 특히 널리 쓰였습니다. 초기 사진 대부분은 초상이었고, 미국은 은판 사진을 가장 열광적으로 받아들여 가장 오래 썼습니다. 사진관은 궁전처럼 화려하게 꾸몄습니다 S4.
값이 내려가면서 초상을 갖는 사람도 늘었습니다. 1854년 초상 사진을 명함 크기로 찍자는 제안이 나온 뒤 값싼 소형 초상이 퍼졌고, 1888년에는 둘둘 만 필름(롤필름)을 넣는 카메라가 나왔습니다 S4. 화가에게 돈을 주고 초상을 그리게 할 수 없던 사람도 자기 얼굴 사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근거 대기

「로브코비츠 공 (Prince Lobkowitz - 앙드레아돌프외젠 디스데리, 1858)」: 파리의 사진가 디스데리가 찍은 인화지입니다. 한 장에 같은 남자의 작은 초상 여덟 컷이 칸을 나눠 찍혀 있어, 칸마다 잘라 내면 작은 초상이 됩니다. 일곱 컷은 같은 커튼과 기둥 앞에서 앉고, 서고, 기댄 자세이고, 오른쪽 아래 한 컷은 배경 없이 팔짱을 끼고 서 있습니다.
앙드레아돌프외젠 디스데리, 「로브코비츠 공」, 1858, 알부민 인화, 20×23.2 cm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1995.170.1, 공개 도메인
전쟁과 움직임
사진은 전쟁도 기록했습니다. 크림 전쟁(1853~56년, 러시아와 영국·프랑스·오스만 제국이 흑해 연안에서 싸운 전쟁)과 미국 남북전쟁(1861~65년, 미국 북부와 남부 주들이 싸운 내전)이 사진으로 기록되었습니다 S4. 근거 대기 다만 크림 전쟁 때 찍은 사진은 전투 장면이 아니라 빈 전장과 자세를 잡은 단체 사진이었습니다 S4.
연속으로 찍은 사진으로 움직임을 한 동작씩 나눠 볼 수도 있게 됐습니다. 사진가 머이브리지는 질주하는 말을 연속으로 찍었습니다. 미리 말려 둔 감광판(건판)처럼 더 예민한 재료가 나온 뒤, 프랑스 생리학자 마레는 1882년 1초에 12장을 찍는 총 모양의 연속 촬영기(사진총)를 만들었습니다 S4. 마레는 이렇게 나눈 사진에서 화가가 쓸 만한 자세를 고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S7.
사진은 두 눈으로 보는 방식까지 흉내 냈습니다. 1850년 파리에서 두 장을 나란히 찍은 입체 사진을 선보이자 수천 명이 몰렸고, 1851년 런던 만국박람회에 나온 입체경(두 장을 나란히 놓고 한 장처럼 겹쳐 보게 하는 기구)은 영국 여왕의 눈에 들었습니다 S6.
사진은 예술인가
사진은 예술일까요? 이 물음에 이 세기의 사진가들은 서로 다르게 답했습니다. 영국 사진가 헨리 피치 로빈슨은 사진도 그림처럼 구성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1869년 사진가도 "보기를 배워야" 한다며, 하늘이 비어 있는 풍경 사진에 따로 찍은 구름을 합성해 넣는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S5.
반면 영국 사진가 피터 헨리 에머슨은 자연을 보이는 대로 찍자는 『자연주의 사진』을 썼다가, 뒤에 사진은 예술이 될 수 없다고 결론지었습니다 S4.

같은 물음은 풍자화에도 나왔습니다. 「사진을 예술의 높이로 끌어올리는 나다르 (Nadar Élevant la Photographie à la Hauteur de l'Art - 오노레 도미에, 1862)」는 프랑스 화가 도미에의 석판화입니다. 파리의 사진가 나다르가 열기구 바구니에 매달려 지붕 위에서 카메라를 아래로 겨누고, 아래 지붕마다 "사진(PHOTOGRAPHIE)" 간판이 줄지어 있습니다. 제목의 '예술의 높이'를 열기구가 뜬 높이로 바꿔 놓은 풍자입니다.
오노레 도미에, 「사진을 예술의 높이로 끌어올리는 나다르」, 1862, 석판화, 26.7×22.1 cm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26.52.4, 공개 도메인
바다를 건넌 그림
유럽 밖의 그림도 유럽 화가의 눈을 바꿨습니다. 먼저 일본입니다. 1820~30년대 일본에서는 에도 시대 판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후지산 연작 같은 색판화가 나왔습니다 S13. 이런 판화를 우키요에라 부릅니다. 에도 시대 도시의 부유한 상공인들이 즐기던, 대량으로 찍어 판 목판화입니다 S18.
같은 시기 판화가 우타가와 히로시게는 명소를 비·눈·밤 불꽃놀이 같은 날씨와 시간에 담았습니다 S13.
1853년 일본이 서양 배에 항구를 연 뒤, 이런 판화가 유럽에 대량으로 들어왔습니다.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는 일본 전시관이 처음 공식으로 섰습니다 S12. 프랑스 화가 에드가 드가는 일본 판화의 긴 화면과 한쪽으로 쏠린 구도, 비워 둔 공간을 받아들였습니다 S12.
중국에서도 그림이 상품이 되었습니다. 화가 쉬구는 여러 도시를 오가며 그림을 팔아, 1870~80년대 상하이 산수화를 대표하는 화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1851년 청나라 군대에 들어갔다가 반란을 일으킨 태평천국 쪽에 동조해 탈영하고 승려가 된 사람입니다 S14.
인도에서는 무역과 통치를 맡은 영국 회사, 동인도회사의 직원들이 인도 화가에게 동식물과 유적, 사람을 유럽 사람 눈에 익은 사실적인 채색으로 그리게 했습니다. 19세기 초에는 관광객이 사 갈 만한, 같은 주제를 묶은 그림 세트도 생겼습니다 S15.
북인도 비카네르 왕국의 한 궁정 화가가 1860~70년대에 그린 군주 초상은 처음 보면 사진처럼 사실적입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1997년 도록은, 화가가 사진이 왕실 후원자 사이에 퍼진 것을 알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S16.
밤의 빛
밤의 빛도 바뀌었습니다. 세기 초 유럽 대도시를 도시가스가 밝혔고, 석유 램프와 백열전구가 뒤를 이었습니다 S8. 미국 경제학자 윌리엄 노드하우스는 19세기를 조명 기술이 발전하고 조명 비용이 크게 떨어진 세기로 봅니다 S8. 조명이 싸지자 도시의 거리마다 가스등이 섰습니다. 근거 대기

「아르 제 메티에, 옛 모델 (Arts et Métiers, Ancien Modèle - 샤를 마르빌, 1864)」: 파리의 사진가 마르빌이 찍은 거리의 가로등입니다. 돌 받침 위의 가로등이 화면 가운데 높이 서 있고, 그 뒤로 석조 건물이 줄지어 멀어집니다. 낮에 찍은 사진이라 불은 꺼져 있습니다.
샤를 마르빌, 「아르 제 메티에, 옛 모델」, 1864, 알부민 인화, 36.6×24.1 cm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2007.167, 공개 도메인
2-2이 시대의 동력
앞에서 본 변화, 곧 사진의 확산과 바다를 건넌 판화, 밝아진 밤은 무엇 때문에 일어났을까요?
- 과학기술: 사진의 재료가 은판 사진(다게레오타입)에서 습판, 건판, 롤필름으로 이어졌습니다 S1·S3·S4. 조명은 가스와 석유, 전기로 바뀌었습니다 S8. 1841년 미국 화가 존 랜드는 물감을 담아 짜서 쓰는 주석 튜브의 특허를 받았습니다 S9. 튜브 덕분에 물감을 들고 밖에 나가 그리기가 쉬워졌습니다. 근거 대기
- 전쟁과 정치 격변: 크림 전쟁과 남북전쟁은 사진으로 기록되었습니다 S4. 일본은 1853년 항구를 열고 1868년 새 정부가 섰으며 S12·S13, 중국에서는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났고 S14, 인도는 영국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S15. 이 격변들이 판화와 그림이 오가는 길을 열었습니다.
- 경제와 계급: 18세기 말부터 커진 중산층의 그림 수요가 값싼 판화와 초상을 불렀고 S4, 일본에서는 명소를 찾는 여행객이 풍경 판화를 샀습니다 S13. 파리는 1853~70년 큰길과 공원을 새로 냈습니다 S17.
- 사상: 영국 비평가 존 러스킨은 그림을 잘 그리려면, 앞을 못 보던 사람이 갑자기 눈을 뜬 것처럼 사물의 뜻을 모른 채 색의 얼룩을 그대로 보는 연습이 먼저라고 썼습니다. 그는 이것을 "눈의 순진함"이라 불렀습니다 S10. 독일 과학자 헬름홀츠는 화가가 햇빛을 노랗게, 달빛을 푸르게 그려 모자란 밝기를 색으로 보충한다고 분석했습니다 S11.
- 철도와 증기선: 철도와 증기선은 사람과 물건이 오가는 속도를 바꿨고, 기차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은 사람들이 풍경을 보는 방식까지 바꿨습니다. 근거 대기


두 그림 모두 증기기관차를 그렸습니다. 왼쪽 「급행열차 (The Express Train - 찰스 파슨스, 1859)」는 미국 석판화로, 붉은 바퀴의 기관차가 객차를 끌고 들판을 지나는 모습을 옆에서 그렸습니다. 오른쪽 「노르망디 기차의 도착, 생라자르 역 (Arrival of the Normandy Train, Gare Saint-Lazare - 클로드 모네, 1877)」은 빛의 순간을 짧은 붓질로 그린 프랑스 인상파 화가 모네가, 파리의 역 안에 서서 철골 유리 지붕 아래 기관차의 흰 증기를 그린 그림입니다 S17.
찰스 파슨스, 「급행열차」, 1859, 손채색 석판화, 45.1×67.6 cm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63.550.62, 공개 도메인 · 클로드 모네, 「노르망디 기차의 도착, 생라자르 역」, 1877, 캔버스에 유채, 60.3×80.2 cm — 시카고 미술관 1933.1158, 공개 도메인

1891년 독일 지도첩의 세계지도입니다. 지도 아래 기호 풀이(범례)에 철도와 바다 증기선 항로가 따로 있고, 대서양과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항로가 점선으로 여러 가닥 그어져 있습니다.
"Weltkarte in Mercators Projection", 『슈틸러 지도첩』 5번, 1891, 고타: 유스투스 페르테스 — 위키미디어 공용, 공개 도메인
2-3오늘날의 시각문화에 준 영향
19세기가 남긴 것은 무엇일까요?
- 사진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의 범위: 값싼 소형 초상과 롤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가질 수 있는 사람이 크게 늘었습니다 S4. 이것이 누구나 사진을 찍는 오늘의 문화로 이어졌습니다. 근거 대기
- 보는 일을 훈련한다는 생각: 로빈슨은 사진가에게, 러스킨은 화가에게 보는 일 자체를 훈련하라고 했습니다 S5·S10. 이 생각은 오늘의 시각 교육으로 이어졌습니다. 근거 대기
- 다른 문화의 구도를 받아들이는 길: 일본 판화가 서양 그림의 구도에 들어간 길은 박람회와 수집 기록으로 확인됩니다 S12.
19세기에 깔린 철도와 역 가운데 일부는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근거 대기

구부러진 철로 옆에 벽돌 승강장과, 네모난 벽돌 굴뚝을 얹은 역사, 철제 가로등이 서 있고, 멀리 작게 열차가 보입니다.
사진: Blake Sherman, "A train station with a train on the tracks", 2022 — Unsplash, Unsplash Lice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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